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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는 침묵의 장기이자 근력이다

회계 이야기 · 2026-09-29

창업자들에게 재무 얘기는 늘 맨 뒤로 밀립니다. 미루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들은 대체로 합리적입니다. 다만 회사가 자라다 보면 그 이유가 슬그머니 맞지 않게 되는 때가 옵니다. 그때를 알려 주는 신호가 거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입니다.

왜 미루게 될까

하나, 언어가 낯설다

재무와 회계는 외국어에 가깝습니다. 매일 쓰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언어지만, 일 년에 몇 번 재무제표를 보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문장이 되지 않습니다. 문장이 되지 않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멀어집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배울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회계에는 현실의 거래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규칙도 많습니다. 차변과 대변은 모든 거래를 왼쪽과 오른쪽에 한 번씩 적어 양쪽의 합계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자산과 부채가 어느 쪽에 적히는지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것도 이해한다기보다 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용어도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기업회계기준이 일본 것을 많이 참고하다 보니 일본식 용어가 많습니다. 감가상각비는 그나마 좀 들어 보셨겠지요(사실 회계상의 감가상각비는 중고차에서 자주 듣는 감가상각과 뜻이 조금 다릅니다). 대손충당금은 또 어떤가요? 이런 이름들이 재무제표 한 장에 수십 개씩 늘어서 있으니, 펼쳐 든 사람이 내용에 닿기도 전에 단어에서 먼저 지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둘, 더 급한 불이 있다

창업 초기에는 더 중요한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만들고 있는 제품이 시장이 원하는 것인지 확인해야 하고, 고객을 모아야 하고, 함께 일할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게다가 매일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아침에 직원들이 큰일 났다며 이슈를 들고 옵니다. 주요 고객이 떠나고, 서버에 오류가 생기고, 경쟁사가 비슷한 기능을 내놓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 소리를 냅니다. 소리를 내는 문제는 자연스럽게 먼저 처리됩니다.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또 하나가 생기고, 그렇게 하루가 갑니다.

반면 재무와 회계는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재무를 '침묵의 장기'라고 부릅니다. 간이 웬만해서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재무도 먼저 말을 걸어오는 법이 없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는 일은 소리를 내는 일에 밀려 늘 뒤로 갑니다.

셋, 뒤처리라고 생각한다

가장 흔한 오해는 순서에 관한 것입니다. 사업이 먼저 벌어지고 숫자는 그 결과를 정리하는 일이니, 사업을 잘 굴려 놓으면 나머지는 누군가 처리해 주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회계의 상당 부분은 실제로 사후 정리 작업이고, 그 일을 대표가 직접 할 이유도 없습니다.

실제로 많은 회사가 장부 작성을 세무사에게 맡깁니다. 매달 기장이 되고, 때가 되면 세금 신고도 끝나니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이미 맡겨 두었으니 더 신경 쓸 일이 없다고 느끼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들

그런데 숫자를 조금만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소리 없이 지나가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 현금이 어디서 마르는지 미리 보입니다

회사가 어려워지는 건 적자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장부상 흑자인데 현금이 모자라 힘들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매출이 늘면 아직 받지 못한 돈도 함께 늘고, 더 많이 팔려면 그만큼 재고를 미리 쌓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잘 팔릴수록 오히려 현금이 빠듯해지는 구간이 있는데, 손익계산서만 보면 이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익은 계속 나고 있으니까요.

고객에게 꾸준히 팔고 있어도 돈은 정산 기간이 지나서야 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이에 부가세 납부나 성과급 지급처럼 큰돈이 나갈 일이 겹치면 통장이 생각보다 빨리 얇아집니다.

반가운 것은, 이런 일은 대부분 미리 보인다는 점입니다. 석 달 치 현금 흐름을 한 장에 펼쳐 두기만 해도, 언제 숨이 가빠질지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습니다.

둘, 투자자와 같은 말로 이야기하게 됩니다

같은 사업을 하고 같은 매출을 내더라도, 이번 분기에 왜 꺾였는지, 원가 구조가 어느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회사는 투자자에게 훨씬 편안하게 다가갑니다. 투자자는 이해할 수 있는 회사에 확신을 갖기 때문입니다.

실사 단계에서는 이 차이가 더 또렷해집니다. 제출한 숫자와 장부가 잘 맞아떨어지면 대화는 사업 이야기로 곧장 넘어갑니다. 숫자를 맞추느라 몇 주를 쓰는 대신 회사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습니다.

투자자가 숫자에 까다로운 것은 회사를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회사가 자기 숫자를 설명해 주면, 투자자도 그 숫자를 믿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무는 투자받을 때 급히 꺼내는 자료라기보다, 평소에 조금씩 쌓아 두는 기초 체력에 가깝습니다.

셋, 판단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활동은 결국 숫자로 모입니다. 재무는 사업이 지나간 자리를 정리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금 회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마케팅비를 얼마나 쓸지 고민한다고 해 보겠습니다. 사업 초반에 작은 금액이라면 시험 삼아 몇 번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고객 한 명을 데려오는 데 드는 돈과 그 고객이 회사에 남기고 가는 돈을 나란히 놓고 보면, 어디에 더 쓰고 어디서 줄일지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사업부별 손익을 따로 보기 시작하면서 오래 끌어 온 사업을 새로 보게 되는 회사도 많습니다. 물론 전략적인 이유로 어떤 사업의 적자를 감수하는 것은 충분히 좋은 선택입니다. 숫자가 있으면 그것이 선택한 길이라는 것을 대표님 스스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대표님이 재무에 더 많은 시간을 쓰셔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어렵고, 대표님이 가장 잘하실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저희가 권하고 싶은 것은 대표님의 시간이 아니라 회사의 자원을 재무에 조금 더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과 시스템에요.

첫째는 결산 체계입니다. 매달 같은 날, 같은 모양으로 정확한 숫자가 나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숫자가 늦게 나오거나 달마다 모양이 다르면 지난달과 견주어 볼 수가 없습니다. 숙련된 회계 인력과 전산 시스템이 있으면 좋고,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몇 달에 걸쳐 조금씩 다듬어 가면 됩니다.

둘째는 재무 보고서를 읽어 주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경영자는 매출액과 영업이익 정도만 봅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회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보고서를 잘 만들고, 그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대표님 옆에서 읽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습니다. 따로 공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몇 달 옆에서 듣다 보면, 외국어처럼 어느 날부터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 달 통장 잔액과 손익계산서를 한 번만 나란히 놓고 보세요. 이익은 났는데 통장이 왜 이만큼인지, 그 차이를 한 줄로 설명해 보는 것만으로도 숫자가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실 겁니다.

재무는 침묵의 장기입니다.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으니, 가끔 우리가 먼저 안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재무는 회사의 근력이기도 합니다. 근력은 하루아침에 붙지 않지만, 조금씩 쌓인 만큼 회사는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멀리 달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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